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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193 의 방문에서 거사에 대한 분명한 확답을 받지 못하였는지 정확한 정황 은 알 수 없으나, 그후 다시 윤보천의 집을 찾아갔다. 거기서 김기수는 뜻밖에도 경찰서장(경부警部; 암견구광岩見久光)과 조선인 순사 윤성경尹 聖敬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들은 현 상황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면서 언쟁을 벌였다. 김기수는 예수교인답게 ‘평화의 복음福音’이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암 시적으로 조선의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였다.42) 이에 대해 윤성경은 “매일신보 신문에 이 태왕(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것 은 와전된 내용이며, 이로 인해 각 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며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꾸짖듯이 나무랐다. 그러자 김기수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역시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람이 알 수 없 는 것이다. 다만, 결과는 하늘의 명을 기다릴 뿐”이라고 대꾸하면서 만세 운동의 당위성에 대해서 우회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경찰서장과 순 사는 이것이 곧 만세운동을 선동하는 것이라며 ‘형사기록부’에 손도장을 찍도록 강요하였다.43) 이때 윤보천은 밖에 나가고 그 자리에 없었다. 김기수가 청송면의 윤보천을 찾아간 것은 그를 통해 청송면의 분위기 를 파악하고 읍내와 연합한 거사를 계획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 다. 즉 대대로 청송에 터를 잡고 살아온 토호 집성세력으로서 무시못할 그들 일족의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추측 일 뿐 결과는 분명하지 않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내용 중에서 “오늘 저 녁 군수를 설득하여 영천에 이르러 이를 모의할 예정이다”이었다고 공술 한 대목은 더욱 그러하다.44) 다(尹澤廷씨-윤보천의 손자 증언, 청송읍 월막리 거주, 71세, 2004.8.21 밤, 전화). 42) 그가 인용한 성경의 내용은 이렇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신약 에베소서[以弗所] 2장 14절) 43) 高等法院 「判決文」(大正 8년-1919년 5월 20일). 44) 1919년 청송군수는 권병선(權丙宣)이었다(‘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