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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 청송의 독립운동사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되는데, “오는 3월 23일 경 화목시장에서 예수교도와 지방 유지를 비롯해서 수백 명이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려고 한다”는 소 식과 “조선에서는 예수교도들이 미국과 연합하여 한국의 독립을 결행하 기로 되어 있으며, 이웃 영천永川 및 자천慈川에서도 만세를 부를 계획이 있다”는 소식이다.39) 이규백으로부터, 이러한 소식 을 전해들은 김기수는 적극적으 로 청송지역 만세운동을 추진하 고자 하였다. 이에 그는 17일 청 송읍(면)에 사는 윤보천尹輔天을 만나러 가면서 본격적인 움직 임을 보이게 된다. 김기수는 만세운동을 추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력히 피 력하면서 그를 설득했다.40) 윤보천은 청송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사람 으로서, 평소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41) 그러나 3월 17일 당했을 때 보현산 정상에 장사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많은 제자들의 도 움이 있었다고 한다(李增熙-이규백의 현손 증언, 2004. 8. 30. 밤, 전화통화 및 팩스). 백자리에 있는 서당은 청송 뿐 아니라 이웃 영천 등지에서까지 학생들이 찾아와서 한때는 미처 수용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서당 옆 논에 천막까지 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산골 벽촌에 살고 있었지만 외지 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그의 제자들을 통해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으리 라 짐작된다. 또한 강직하고 반일적인 그의 성품 역시 주변에 잘 알려져서 이점이 김기수로 하여금 그를 찾아가게 만들고 그와 민족적인 거사를 도 모하고자 하지 않았겠는가 추측된다. 그러나 만세운동에 대한 구체적 참여 부분에 있어서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39) 김기수의 大邱覆審法院 「判決文」(大正 8년-1919년 4월 24일). 40) 大邱覆審法院 「判決文」(大正 8년-1919년 4월 24일). 41) 그의 한약방 별채에는 언제나 외부 출입인사들로 붐볐으며, 그 손님들을 대접하 느라 항상 많은 밥을 준비했다고 한다. 위치는 청송교 옆 현 대구 병원 자리이 <김기수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