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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 / 191 경북지역 만세운동의 절정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청송은 인근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청송의 인근지역이란 의성 (12일)‧안동(13일)‧영덕(18일)‧영양(24일)‧영천(26일)으로써 영천을 제 외하고는 모두 청송보다 시위가 일찍 일어났다. 청송지역 만세운동이 인근 지역에 비해 늦게 전개되었지만, 시도자체가 늦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위에 대한 논의는 이미 3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 예수교 조사37)로서 평소 독립의 염원을 품고 있었던 현서면 구산리의 김 기수金基洙는 만세운동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는 주변 각지에서 시시 각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청송에서도 시위를 도모할 생각으로 3월 10일 경, 현서면 백자리에서 서당을 열고 있는 이규 백 李圭伯을 찾아갔다.38) 그는 이규백을 통해 만세운동에 대한 두 가지의 * 위 표는 朴成壽, 獨立運動史硏究 , 創作과 批評社, 1980, 303쪽의 내용을 재인용하였음. 시 기 운동발생 개소 참가인원 전기 3ㆍ 1∼3ㆍ19 216 123,347 중기 3ㆍ20∼4ㆍ 9 495 432,921 후기 4ㆍ10∼4ㆍ30 65 13,714 37) 助事(Helper)란 한국인 목사가 대거 양성되기 전 선교사들을 도와 교역(敎役) 일선에서 직분을 맡아 수행했던 이들을 뜻한다. 즉 정식 신학 교육을 마치지 는 않았지만 선교사의 전도‧치리‧순회심방 등의 일체 활동을 보좌하고, 혹은 그 단독으로 조직‧미조직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의 전도사 나 강도사가 수행하는 직분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으나 교회법적 정식 직분 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초기 교회의 과도기적인 교직, 또는 선교사 중심시기 의 독특한 역할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01년 1월에 영문으로 간행된 당시 한국 교회의 기본 규칙인 “Standing Rules and by Rules"에는 “A Helper is a Christian personally attached to a missionary as his or her special assistant in the work"이라고 기록하여 조사 의 직분 성격의 한계를 규정해 주고 있다(기독교문사, 基督敎大百科事典 13권, 1986. 4. 30. 재판, 1207쪽). 38) 이규백(1860∼1942)은 본관이 경주이씨로서 3‧1운동 당시 60세였다. 그는 자식에게도 학교를 못 다니게 하였는데 일본글 배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그의 아들 鍾燦 역시 서당 훈장을 이어 받았다. 이규백이 모친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