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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 청송의 독립운동사 로 돌아와서 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경우이다. 그리고 넷째는 인근지역의 만 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시위를 일으킨 경우로, 청송지역이 이에 해당한다.35) 경북의 경우 대구를 제외하고는 중앙조직으로부터 직접선언서를 전달 받아 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은 보이지 않는다. 즉, 중앙과 연계된 만세 운동은 대도시에 국한되며 중소지방은 각기 다른 요인에 의해 독자적으 로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안동‧예천은 국상에 참여한 유림들에 의해서, 의성‧영덕‧김천은 평양신학에서 유학하던 신학생들이 서울에서의 시위를 목격하고 귀향하면서부터 만세운동의 단초가 열렸다. 그러나 청송 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안동이나 의성의 경우처럼 유 학생들이 귀향하여 만세운동의 분위기를 이끌어나간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청송지역 만세시위의 발원은 평소 독립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던 인사들 이 주변지역에서 들려오는 만세운동 소식에 고무되어 시위를 일으킨 자 생적인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청송 3‧1 만세운동은 3개면에서 네 차례 정도 일어났다. 3월 25일 진보면 진안리 장터(구 장터)에서 한 차례 일어났고, 다음날 현서면 구산리 화목장 터(구 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27일까지 이틀 간 계속되었는데 이들 두 시위는 각각 별도로 일어났다. 그리고 청송읍(면)에서 4월 초까지 두 세 차례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다. 이렇듯 3월 하순에 집중된 청송만세운동은 3‧1운동 전체를 놓고 볼 때 시위가 가장 많이 일어난 절정기에 해당되나, 청송 인근지역에 비해서는 다소 늦은 편이었다.36) 경북은 대구에서 3월 8일 첫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3월 20일 경에 이르러 전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즉 3월 20일 경이 35) 金鎭鳳, 三‧一運動史硏究 , 國學資料院, 2000, 55쪽. 36) 1919년 3월 1일부터 19일까지를 전기, 3월 20일부터 4월 9일까지를 중기, 4월 10일 이후 4월말까지를 후기로 구분하여 보면 시위발생 개소나 참가 인원수 는 중기가 절정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