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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 청송의 독립운동사 2) 3‧1운동의 국외 확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국내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여파는 국외에까지 파급되어 만주‧연해주‧미 주 등 한인이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 되었다. 만주지역에서는 서간도와 북간도 등에서 한인들이 만세시위를 펼 쳤다. 서간도에서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12일 부민단扶民團이 주축이 되어 유하현 삼원포와 통화현 금두복락 金斗伏洛에서 수백 명의 동포들이 독립축 하회를 개최하고 만세시위를 벌인 것이다. 북간도에서는 3월 13일 정오, 1만여 명의 한인들이 용정 북쪽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 모여 독립선언과 만 세시위를 가졌다. 또 훈춘지방의 만세시위는 3월 20일에 있었다. 이날 아침 일찍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하고 상가의 문을 닫은 한인들이 오전 8시경 동대인구東大人溝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악대 의 연주에 맞추어 태극기를 흔들며 서문 밖 광장으로 행진하였다. 이후 만 주지역에서는 3월 21일에 봉천 안산참鞍山站을 비롯하여 이후 4월 10일에 냉수천자冷水泉子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노령 연해주의 한인사회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7일 블라 디보스토크 일대의 한인 집단거주지인 신한촌에 대형 태극기를 게양한 한인들은 대오를 지어 만세행진을 하였는데, 오후 4시경에는 블라디보스 토크 주재 11개국 영사관과 러시아 당국에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명의 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일본 총영사관 앞을 행진하면서 열띤 만세시 위를 벌였다. 외교분쟁을 우려한 러시아 당국의 탄압이 있자, 격분한 한 인 노동자들은 이튿날인 3월 18일부터 동맹휴업을 단행하였으며, 학생들 은 동맹휴학으로 호응하였다. 노령지역에서는 우스리스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도 만세시위가 펼쳐졌다.27) 27) 반병률, 「이동휘와 3‧1운동」, 조동걸선생정년기념논총 한국민족운동사연구 , 나남출판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