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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 청송의 독립운동사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고종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 고, 일부는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또 미국 영사관 앞에서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24)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 개되었다. 그러나 공약삼장에 밝힌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비폭력 평화시 위를 전개하여 한 건의 폭행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3. 3‧1운동의 국내외 확산과 일제의 탄압 1) 3‧1운동의 지방 확산 3‧1운동은 3월 중순까지 국내만이 아니라 국외지역 동포사회에까지 확산 되어 갔다. 국내의 경우는 전파되는 경로에 몇 가지 특성을 보였다. 첫째, 교통망에 따라 확산된 점이다. 철도 교통망을 따라 그 주변의 대도시로 퍼져 나갔고, 대도시의 장날에 시위가 크게 일어난 뒤, 다시 중소도시 장 날을 따라 퍼져 나갔다. 둘째 시위준비 세력이 전국 주요도시에 연락망을 정하고 이에 따라 선언서를 발송한 것이 하나의 경로였다. 서울에서 발송 된 선언서가 지방의 유지들에게 전달되고, 그들에 의해 지방마다 시위가 준비되었다. 셋째 각 지방에서 고종의 장례에 봉도단으로 참여했다가 고향 으로 돌아간 인물에 의해 시위가 확산된 것이 또 하나의 경로였다. 국장에 참여한 인물들은 현장에서 갖게 된 태극기와 선언서만이 아니라 시위현장 의 열기를 그대로 지방에 전달하였던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2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김형기 등 학생단), 독립운동사 자료집 5, 7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