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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청송의 독립운동사 학파적 이질성의 역학관계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송의진은 학파적 이질성에 연유하는 취약성을 극복하고 ‘창 의’라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정재학파의 서효원이 ‘백의종사白衣從事’하 는 대신 노론계를 대표하는 심성지가 대장으로 추대되면서 의진이 결성 된 것이다. 심성지는 노론계의 학문적 성향을 갖긴 했지만, 정재학파의 핵심인물이었던 김도화와 긴밀한 교유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학파와 계 파를 초월한 인맥 형성이 가능한 인물이었다. 결국 청송유림은 학파적 이질성을 극복하고 위정척사라는 대의명분을 매개로 독자적인 의진 결 성에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다.3) 3) 權五榮, 「1881년의 嶺南萬人疏」, 尹炳奭敎授華甲紀念 韓國近代史論叢 , 지식산 업사, 1990; 權大雄, 「1896년 靑松義陣의 조직과 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 제9집, 한울, 1998; 薛錫圭, 「朝鮮後期 嶺南士林의 學風과 靑松士林의 學脈」, 《安東史學》제8집, 安東史學會,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