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page

제4장 3·1운동 / 181 과 투쟁방향을 알렸다. 그리고서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동경조선기 독교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조선학생들이 모여 조선의 독립과 일본과 의 혈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13) 이후 국내 천도교 지도자들이 충격을 받아 독립운동을 본격화하였다. 한편 천도교 인사들은 다시 김윤식金允植‧ 한규설韓圭卨 등 대한제국시기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에게 사람을 보내 동 참을 요구했지만, 별 소득은 얻지 못했다. 한편 학생들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 였다. 강기덕康基德‧김원벽金元璧 등 전문학교 대표들은 회합을 갖고,14)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고 독립선언서의 기초 등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 추진하였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은 2월초에 들어 대통합을 향 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천도교측은 기독교측의 이승훈에게 연합을 제의 하였다. 그 결과 조국독립이라는 명제 아래 교단과 종파의 차이를 극복하 고 연합할 것에 동의하였다.15) 이들은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잡았다. 1월 22일에 붕어崩御한 고종황제 의 장례일이 3월 3일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참례할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몰려들 것을 예상하였다. 그 분위기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규모의 시위를 벌이고자 했는데, 국장일 앞날인 3월 2일이 일요일이었다. 그래서 이 날을 피하자는 기독교측의 요구에 따라 다시 하루를 앞당겨 3월 1일로 거사날짜를 잡았다.16) 그들은 이외에도 구체적인 활동 방침을 확정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657쪽. 1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 867쪽; 李炳憲 編, 「손병희 조선 독립을 선언함」, 3‧1운동비사 , 三‧一同志會, 1966, 64쪽. 15) 李炳憲 編, 「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의 최린 취조서」, 3‧1운 동비사 , 三‧一同志會, 1966, 589쪽; 「1919년 3월 7일 경무총감부에서의 최 남선 취조서」, 3‧1운동비사 , 三‧一同志會, 1966, 659쪽. 16) 李炳憲 編, 「1919년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의 함태영 취조서」, 3‧1운 동비사 , 三‧一同志會, 1966, 64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 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 8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