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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 청송의 독립운동사 으로 뭉친 것이다. 기독교측의 시위계획은 주로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상해에서 파견된 신한청년당원 선우혁鮮于赫의 활약이 연결 고리로 작용하였다.9)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한편 국내와 일본‧만주‧노령의 독립운동세력과 연결하였던 것이다. 선우혁은 1919년 1월말에서 2월 초순경 사이에 평안도로 들어와 이승훈李昇薰‧양전 백梁甸伯 등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들을 만났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와 이에 따른 국제회의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운동 방 법을 협의하였다. 그 영향이 평양과 정주, 선천 일원의 교회와 기독교 계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10) 일본 유학생의 2‧8독립운 동은 국내 천도교 인사들에 게 자극을 주었다. 1918년 말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을 비롯한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독립운동을 추진 하였다.11) 이들은 제1차 세 계대전이 끝나는 상황을 지 켜보면서 조선청년독립단朝 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고 송계백宋繼白을 국내로 파견하여 현상윤玄相允과 최린 등을 접촉하게 하였다.12) 송계백은 그들이 준비하고 있던 독립선언 9) 김희곤, 「신한청년당의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중국관내 한국독립운동 단체연구 , 지식산업사, 1995, 95-96쪽.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 891-892쪽; 「예심종결결정서(김형기 등 학생단)」,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69쪽.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655쪽. 12) 전영택, 동경 유학생의 독립운동 ,《신천지》1권 3호, 1946년 3월, 98-99쪽. <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