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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 청송의 독립운동사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는 1918년 11월이었다. 국내외에서 독립운 동에 전념하던 모든 이들이 여기에 시선을 집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국외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은 이에 대한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전쟁 마무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프랑스 파리Paris에서 열린다는 소식은 우리 독립운동가들에 게 독립을 위한 기회라는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에 몸담고 있던 인물들은 모두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자 했다. 중국에서는 신규식申圭植이 이끄는 동제사同濟社와 여기 에서 성장한 여운형呂運亨이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다.3) 신규식 의 지도를 받은 여운형이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선임하여 파리에 파견한 것이 그 대표적인 일이다.4) 이런 움직임이 결코 중국 본토지역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연해 주 동포나 일본 유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일본 유학생들은 2월 8일 일제의 수도인 동경에 자리잡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독립을 선언한 ‘2‧8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일본에 ‘혈전’을 선언하고 나섰다.5) 이 무렵 중 국지역 인사들은 일본 유학생들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연계를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 동포사회도 대표 파견을 결정하였다.6) 그러나 미국 정부 아니었다(프란크 볼드윈, 「윌슨‧민족자결주의‧3‧1운동」, 3‧1운동 50주년 기념 논문집 , 동아일보사, 1969 참조). 3) 金喜坤, 「 同濟社와 상해지역 독립운동의 태동」, 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 硏究 , 지식산업사, 1995. 4) 여운홍, 夢陽呂運亨 , 靑慶閣, 1967, 27쪽; 國會圖書館編, 「강화회의에 있어서 의 한인 독립운동자의 행동에 관해 1922년 10월 19일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장이 외무차관에 통보한 요지」, 韓國民族運動史料 중국편, 191쪽. 5) 金正明, 「在日朝鮮人留學生2‧8獨立宣言書發表の件」, 朝鮮獨立運動 1, 국학자료원, 1999, 300쪽; 田榮澤, 「東京 留學生의 獨立運動」,《新天地》1권 3호, 1946년 3월, 9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 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 6, 892-893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 654-655‧657쪽. 6)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 1934, 130쪽; 주요한 편, 「安昌浩豫審訊問記補 遺」, 安島山全書 , 897-898쪽; 국사편찬위원회편, 韓國獨立運動史 자료 2, 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