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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910년대의 독립운동 / 173 輯安縣·임강현臨江縣·해룡현海龍縣 등지에 걸쳐 있었으며, 호수는 1만여 호 에 달하였다. 이곳에 한족회에서는 동포 1천 호마다 1명의 천가장千家長을, 1백 호마다 백가장百家長을, 10호마다 십실장十室長 1인씩을 두었다. 이러 한 한족회의 자치조직은 1912년부터 조직되어 있었던 부민단扶民團 등의 체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한족회의 지방자치는 보다 효 과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박영산은 군정서軍政署·정의부正義府·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 등에 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 11일 반석현磐石縣 에서 병으로 삶의 끈을 놓게 되었다.29) 박영산 외에 만주에서 활동한 청송인으로는 남우락이 있다. 남우락은 일본경찰을 폭행하고, 처와 어린 자식을 고향에 남겨둔 채 형제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망명 후 그는 요녕성遼寧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전한다. 때문에 고향에 남은 그의 처 정씨鄭氏는 일본경찰 로부터 갖은 고초를 겪었고, 결국 자결하였다고 한다.30) 현재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전해지는 남우락의 활동에 관한 구체적인 자료 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 29) 박연산의 활동은 국사편찬위원회,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 (8권, 32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獨立運動史資料集 (제14집, 916쪽);《東亞日報》(1931 년 10월 22일자);《朝鮮日報》(1931년 10월 21일자) 참조. 30) 청송군지편찬위원회, 靑松郡誌 , 1990, 5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