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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장 서설; 청송지역 독립운동의 배경 / 7 최시술崔蓍述‧유필영柳必永‧권술붕權述鳳‧김현휘金絢輝‧이병호李炳鎬, 공사원에 김석규金碩奎‧김양진金養鎭‧김상흠金尙欽‧박재홍朴載洪‧하현원河顯源 등이 선 정되었다. 한편 경상우도에서는 황난선 黃蘭善‧이진상李震相‧송인호宋寅濩 등 이 성주의 신광사神光寺에 모여 척사통문을 발송하고, 1880년 12월 15일 개령향교에서 모임을 갖고 척사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청송유림은 정재 유치명의 문인들과 서인계 연재 송병선의 문인 들을 중심으로 위정척사론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영남만인소에서 청송지역의 유생들은 진보를 포함하여 6명(진보 4, 청송 2)이 참가하는데 그쳤다. 위정척사소초 衛正斥邪疏草 에 의하면 남인수南仁洙(청송 도평道坪) ‧김영진金永鎭(청송 문천文川)‧권영상權永相(진보 신한新漢)‧박두현朴斗鉉 (진보 삼산三山)‧안좌익安佐翼(진보 세장世長)‧정익소鄭翼韶(진보 연당蓮塘) 등이다.2) 더욱이 퇴계의 관향인 진보지역의 유림을 제외하면 청송지역 유림의 참여는 매우 저조하다. 이러한 경향은 당시 영남유림의 전반적인 동향이 퇴계학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청송유림이 위정척사 운동에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취약성이다. 1896년 창의하는 청송의진에서도 청송유림의 위상이 반영되고 있다. 즉 청송의진의 구성원을 보면 정재학파를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일정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청송의진의 창의과정에서 대장으로 추대된 정재학파의 서효원이 사람을 모으는 일에 원숙하지 못하다는 이 유로 대장직을 사양했던 것도 그러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안동 의진의 소모장 유시연柳時淵이 청송부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온 갖 협박을 일삼고, 심지어 갓 설치된 청송의진의 수기手旗와 인신印信을 확인하자고 나서는 등 행패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청송지역의 취약성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취약성은 학봉계의 정재학파와 노론계로 양분되는 2) 金俊亨, 「 衛正斥邪疏草 해제」,《慶尙史學》第十輯, 慶尙大學校史學會,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