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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 청송의 독립운동사 가 없는 사람에게 돈을 융통해주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한 청송 인근 지역에도 재산가가 많았는데 굳이 경주까지 박상진을 찾아가 돈을 융통 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면 박상진과 권영만은 1914년 이전부터 친분관계 를 유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권영만이 진보지역의 재지사림으로 성장해가면서 당시 이 지역의 학문적인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허훈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허훈이 박상진의 스승인 허위許蔿의 형이었으며, 1894년 진보의병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허훈은 아우였던 허겸許蒹‧허위와 함께 진보 흥구 에 은둔 생활을 하였다. 이 때 권영만은 허위를 알게 되었고, 박상진은 사종형을 따라 이곳으로 이거하여 1899년 허위의 문하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들은 학문적인 동지이자, 민족운동의 동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권영만이 대한광복회에 합류하게 된 것은 박상진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조선국권회복단에서도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권영만이 대한광복회에 어떠한 경위를 통해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명확 하지 않지만, 이 단체에서 중요한 활동을 펼쳤던 것은 박상진자료집 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 단체가 일제에 의해 와해될 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주비단원으로 군자금모집 활 동을 펼치던 중 체포된 후 재판과정에서 밝혀졌다. 대한광복회에서의 대표 적인 활동으로는 1915년 12월 우재룡 禹在龍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경 북 경주에서 영덕·영일 방면의 우편차를 습격한 것과 일제가 수탈한 세금 8천 7백 원을 탈취한 사건 등을 꼽을 수 있다.27) 이후 군자금모집과 친일 부호 처단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18년 초 이 단체가 노출되자 한 27) 권영만의 활동은 金喜坤, 朴尙鎭資料集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229-24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