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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 청송의 독립운동사 제의 감시를 피해 가족들이 고향을 등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진보향교를 출입하면서 이곳의 유림들과 유대관계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권영만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박상진자료 집 에 의하면 약 3년간 한학을 배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진 보향교 유안 에 등재되어 있을 정도라면 한학 수준을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청송에서 재지사림으로 입지를 다져가던 그는 일제의 한반도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당시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의 병항쟁이었는데, 1907년 정미의병에 참가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 영만이 재지사림으로서 주용 활동무대로 삼았던 진보지역은 1896년 전기 의병 당시 허훈許薰이 의병을 조직하였던 곳이다. 진보의병은 일제와 직 접적인 충돌은 없었지만, 1895년 한반도가 민족운동의 용광로로 바뀌어 가는 길목에 동참하였다. 그가 1907년 의병항쟁에 참여한 것도 이러한 지 역적인 정서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약 15년간 전국을 들끓게 했던 의병항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도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 는다. 그러던 그가 다시 민족운동을 위해 몸을 추스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대한광복회에서의 활동이다. 대한광복회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1910년 대 민족운동을 대표하는 비밀결사단체로 군자금모집과 관공서 습격 및 친일분자를 처단하기 위해 결성된 조직이다. 이 단체에 권영만이 참여하 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어떠한 경위로 대한광복회에 참여하게 되었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단체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 사가 뜻을 함께 하면서 결성되었는데, 풍기광복단은 의병적인 성격이, 조 선국권회복단은 계몽운동적인 성격이 강한 조직이었다. 그런데 권영만이 의병항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로 유추해 볼 때 풍기광복단에서 먼저 활동을 시작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박상진자료집 수록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