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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 청송의 독립운동사 대국가이념을 널리 퍼뜨려 나갔다. 대한광복회는 친일부호를 공격하여 자 금을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협조하지 않는 친일분자를 처단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 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2. 대한광복회와 권영만 의병항쟁과 계몽운동이라는 두 계열이 합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청송 인들도 참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단편적인 자료만 확인된다.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2000년에 발간한 박상진자료집朴尙鎭資料集 (이하 자료집)이 그것이다. 이 자료집은 대한광복회에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부 호처단 등의 활동에 참여했던 박상진의 서신과 재판기록을 정리한 것이 다. 이 자료집에 청송인으로서 확인되는 인물은 권영만이 유일하다.24) 그는 영양군 일월면日月面 도계리道溪里에서 출생했지만, 1922년 진보 광덕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또한 「제적등본」이나 위의 자료 에는 그의 본적이 영양군 입암면立岩面 병곡리屛谷里로 기록되어 있다. 권 영만이 진보로 이주하거지 전에는 입암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사실은 그가 진보향교를 드나들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진보향교 유안儒案 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는데, 이때까지 이 24) 金喜坤, 朴尙鎭資料集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25) 金喜坤, 朴尙鎭資料集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제적등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