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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910년대의 독립운동 / 165 물이었고, 경상도 출신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 조직의 목표는 국권회복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서상일 의 태궁상점太弓商店이나 윤상태의 향산상점香山商店 등을 거점으로 삼고 자금을 조달하였다.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강경 세력이 결합을 모색하고 나섰다. 그 결실이 1915년 7월 대구 달성공원 회합에서 이루어졌으니, 대한광복회 의 성립이었다. 여기에는 채기중과 박상진의 역할이 주효했다. 또 영주의 대동상점도 이에 합류하여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21) 그 결과 대한광복 회는 국내에 100여 곳의 거점을 확보하고 무력에 의한 독립을 달성한다 는 목표를 세운 혁명적인 조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22) 이들은 국외, 특히 만주지역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곳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김좌진金佐 鎭을 부사령으로 파견하기도 했다.23) 박상진의 상덕태상회와 대동상점은 그 대표적인 거점이었다. 풍기광복 단이 의병계열 인물에 의해 풍기를 중심한 경북북부지역의 조그만 조직 에 지나지 않았다면, 대한광복회는 계몽운동계열의 인사와 합쳐지면서 국 내만이 아니라 만주지역을 포함하는, 즉 국내외에 걸친 대규모의 조직으 로 확장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이념이나 사상적인 합류도 이루어지 고 있었다. 공화주의 성격을 가진 이 조직에는 양반과 평민 출신이, 그리 고 전통 한학과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면서 독립운동의 근 21) 대동상점의 규모나 설립 배경 등은 梁漢緯의 梁碧濤公濟安實記 ; 慶尙北道 警察部의 「大東商店件」( 高等警察要史 , 1934, 264쪽), 大正 7年 刑控 第413號 (「判決」 朴濟璿의 ‘保安法違反事件’); 權大雄의 「1910年代 慶尙道地方의 獨立 運動團體 硏究」(嶺南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3, 61-63쪽)가 참고된다. 22) 趙東杰, 「大韓光復會 硏究」,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 , 지 식산업사, 1989, 291-302쪽. 23) 趙東杰, 「大韓光復會 硏究」,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立運動史硏究 , 지 식산업사, 1989, 283-2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