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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 청송의 독립운동사 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 족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분산적인 투쟁이 효과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병과 계몽운동의 합류는 독립운동의 발전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독 립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각각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이념과 방략을 주고받 으며 망국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러는 독립군으로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 다. 두 계열의 합류 시도는 191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이루어졌는데, 대한광복회와 13도의군이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이 가운데 청송인들과 직 접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은 대한광복회로 짐작된다. 이 단체에 참여했던 청송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청송인으로 확실한 사람은 권영만權寧萬 뿐이다. 대한광복회는 독립군기지건설이라는 대명제 아래 1915년에 조직된 혁명 단체로서, 이전의 선행조직들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0) 그 선행조직은 풍기豊基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 단朝鮮國權恢復團이었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 소백산 바로 밑, 풍기에 모인 의병출신자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채기중蔡基中‧전원식全元植‧정성산鄭星山‧ 양제안 梁濟安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거론되는데, 이곳은 정감록鄭鑑錄 에 십승지지十勝之地(전쟁이나 재해가 없는 10곳) 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 다. 그 영향으로 의병항쟁에서 쓰라린 패배의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이 ‘독 립운동’이라는 열망을 가슴에 품고 은둔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15년 음력 정월 보름에 대구 대명동 안일암에서 결 성된 계몽운동단체로서, 윤상태尹相泰‧서상일徐相日‧이시영李始榮‧홍주일洪宙 一‧박상진朴尙鎭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대다수가 계몽주의 성향을 가진 인 20) 趙東杰, 「大韓光復會의 結成과 그 先行組織」, 韓國民族主義의 成立과 獨 立運動史硏究」, 지식산업사,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