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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인은 권상술權商述‧조성태趙性台‧신상극申相極‧김진성金鎭聲‧권상술權商術 등 이며, 김도화의 문인은 서석화徐錫華‧조성태‧이상일李相日 등이다. 그 중 서 효원은 청송지역을 대표하는 정재학파의 일원으로 청송지역의 학풍을 주 도하고 있었다. 서효원의 문인은 서효신徐孝信‧서효격徐孝格‧서효달徐孝達‧ 김숭진 金崧鎭 등이다. 한편 청송지역에는 서인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는 인물들이 주목된다. 그 대표적인 예로 소류小流 심성지沈誠之는 서인에서 노론으로 이어지는 청송심씨 가문의 성리학적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는 둔와遯窩 유양흠柳養 欽의 문인이기는 하나 서인의 학풍을 계승하여 심능규沈能奎‧장병두蔣柄斗 ‧심의춘沈宜春 등의 제자를 양성하며 청송지역에서 독자적인 학풍을 유지 하고 있었다. 그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학통을 계승한 유인석柳麟錫의 문인 서석기徐錫琦,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하면서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 고,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에 항거해 자결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 인 심동택沈東澤‧심의도沈宜燾‧심의상沈宜商‧심의진沈宜振 등도 서인의 계보 를 계승한 청송사림의 일원이다. 이와 같은 청송사림의 학문적 경향은 19세기 후반, 외세의 침략에 대항 한 위정척사운동 내지는 항일민족운동에 반영되고 있다. 위정척사운동은 “중화의 명맥을 보전하여 조선이 금수가 되는 것을 막고, 세계의 중심이 화맥을 계승한 조선에 있다”는 위정척사론에 근거한 유림의 정치적 운동 이다. 영남유림이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척사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계기가 되 었던 것은 1880년 수신사修信使 김홍집金弘集이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조 선책략 朝鮮策略 이었다. 1880년 11월 안동‧영주 등지에서 조선책략 을 비판, 복합을 위한 척사통문이 도산서원과 영주향교에서 발송되었다. 이로인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점화되었는데, 이른바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이다. 1880년 11월 26일 안동향교에서는 도내 유생 800여 명이 참석한 도회 가 열었으며, 여기에서 이만손李晩孫은 소수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조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