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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910년대의 독립운동 / 161 영남지역의 유학에 자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시대가 내려오면서 현실에 서 멀어져 허문으로 흐른 폐단을 지적하였다.17) 그들은 모두가 “수시변 역隨時變易”이라는 변통의 원리에 따라 시대에 맞는 신학 수용을 주장하 였던 것인데, 향교의 재원과 지원을 받던 청송지역 사립학교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교육론은 여타의 교육운동 단체나 학교의 설립취지에서 그대로 보였다. 청송의 낙일학교에서도 한문을 기본으로 하고 시무를 용用으로 하면서 어학‧산술‧역사‧지지地誌 등을 교육하였다.18) 또한 근대교육교재 를 발간하던 대구 광문사와 우현서루에서는 신구학문을 절충할 수 있는 교과서를 발간하였고, 대구 수창학교의 경우는 15세 이하는 구학(한문)을 수학하고 15세 이상의 학생은 외국인 신학 교사들로부터 어학과 같은 신 학문을 배웠다.19) 그리고 서원을 기반으로 설립된 도산서원의 보문의숙, 옥산서원의 옥산학교, 삼계서원의 조양학교 등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시 설립된 학교 가운데 설립취지서 등을 통해 교육 이념이나 설립자 등에서 특징적인 점을 정리하면 ‘수시변통隨時變通, 고금참작古今參酌’이라 는 원칙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립학교는 설립주체에 따라 종교학교, 민립학교로 구분된다. 종교학교는 미션학교‧ 향교학교‧서원학교‧불교학교로, 민립학교는 문중학 교‧지역학교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청송지역의 사립학교는 종교학교이자, 향교학교였다. 향교학교는 민간 유생들이 모은 재원과 함께 현지의 관찰 사는 군수 등의 의연과 향교에 부속한 전답이나 건물 등이 학교의 재원 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청송지역 사립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청 17)《皇城新聞》1908년 9월 24일자, ‘慶州郡敎育會’‧9월 18일자, ‘嶺儒開明’‧9월 3일자, ‘東明設立’. 18)《大韓每日申報》1907년 6월 15일자, ‘淸松君私立樂一學校趣旨書’. 19)《大韓每日申報》1907년 12월 21자, ‘學界競爭’‧10월 8일자, ‘大邱壽昌學校 趣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