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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 청송의 독립운동사 하게 서술되어 있어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다. 당시 신문 기사에는 한문으로 된 장문의 낙일학교취지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 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 樂一學校 趣旨文’《皇城新聞》1907. 5. 24> < 낙일학교 취지문>16) ……(전략) 아름답도다! 우리 조선은 500년 동안의 문치가 중국의 이제 二帝(요순) 삼왕三王(우고종‧탕고종‧문왕)에 비길 만 하였다. 서울에는 태학太學(成均館)이 있고, 주州에는 향교鄕校가 있고, 사社에는 서원이 있었는데, 모두 규모가 있었다. ……(중략) 돌아보건대, 나라의 형세가 미약하고 인재가 사라지게 된 것이 오직 이것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 니 어찌 통한스럽지 않겠는가! 우리 대황제(고종-필자)께서 이 세상의 대세를 통찰해 보시고, 나라를 중흥시키고 국기를 태평하게 하는데 마음 을 두셨다. 그래서 먼저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오로지 교육에만 뜻을 두 셨다. 시무時務의 학문을 가르치고, 바로 쓸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였다. 이미 여러 차례 조서詔書를 내리고, 또 내탕금內帑金을 나누어 주셨다. 안팎이 모두 흠모하고 학교가 숲처럼 세워졌으니, 이는 바로 정치의 칭 송이 빛나니 문왕文王 같은 태평을 이룰 때이다. 돌아보건대, 이 곳 청 송靑松 한 군은 비록 외지고 골짜기에 막혀 있으나 옛날부터 이름 있는 고을이었고, 오직 유학을 숭상하였다. 한 번 과거를 폐한 후로는 선비들 의 마음이 해이해지고, 문풍이 점점이 쇠퇴하였다. 젊고 재주있는 사람들 16)《皇城新聞》1907년 5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