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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910년대의 독립운동 / 157 2) 청송지역에서 전개된 교육구국운동 경북지역에 교육구국운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바탕에는 관찰사 신태휴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는 혁신유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들은 의병항쟁을 통해 터득하였던 무 력항재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문명이 필요하다 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울에서 유학하고, 그 곳에서 새로운 사상을 접하면서 개화를 서둘렀던 것이다. 또 서울에서 조직된 학회나 계 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고, 지방에다 그 단체의 지 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결실이 경북지역에 많은 계몽운동 단체와 지회의 결성으로 나타났고, 교육구국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청송지역의 교육구국운동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해 시작되었다. 이 지역 에 설립된 근대식 사립학교는 2군데가 존재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낙일학 교樂一學校와 광덕사립학교廣德私立學校가 그것이다. 낙일학교는 당시 청송 군수였던 안종덕安鍾悳과 이 지역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청송향교의 지원 으로 설립되었으며, 현 청송초등학교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신문 기사로는 1907년경에 설립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청송초등학교의 연혁에 는 1909년에 설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풀어야 될 문제이지만, 1907년 신문기사에 학교설립 취지문이 수록될 정도였다면, 1907년에 설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광덕사립학교는 1909년 9월 청송군수 정형택鄭衡澤과 진보향교의 지원으로 설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기록으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낙일학교뿐이며, 그것도 《황성신문》(1907.5.24 및 6.28)과《대한매일신보》(1907.6.13‧15)에 간략 며, 공립소학교의 재정과 교원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재정 의 기반과 운영에서는 향교재산처리문제에 따른 관청과 유림들과의 갈등 을 사례분석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