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page

제3장 1910년대의 독립운동 / 151 이러한 일제의 탄압은 1910년 5월까지 약 400개의 사립학교가 문을 닫 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 1910년 5월에 종교학교를 제외한 사립학 교는 1,400개에 달하였으나, 1911년 5월에는 1,039개, 1912년 5월에는 817 개로 점차 줄어들었다.6) 즉, 일제의 교육정책은 사립학교를 점차 공립학 교로 전환시키거나 폐교시킴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모든 채널을 봉쇄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철저하게 교과서 내용을 검정하면서 애국심 고취‧배일사상 등을 일체 수록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사립학교 설립운동 외에도 가장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정치‧사회단 체의 활동이었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가 해산 된 이후, 대중을 기반으로 삼은 민간단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겨우 1903년 10월 개신교 선교사들의 주도로 일부 한국인도 참여한 황성기독청년회(YMCA)가 창설되었을 뿐이 었다. 1904년 7월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반대하여 유생‧전직관리‧기 독교 등의 주도로 결성되었던 보안회輔安會가 설립되었다. 비록 오래 유지 되지는 못하였지만, 보안회의 결성은 이후 민간단체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일제는 이에 자극을 받아 친일단체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친일세 력과 독립협회 출신자들을 매수하여 1904년 8월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였 다. 또 비슷한 시기에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던 동학도 민간단체의 형태 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였는데, 12월에 일진회와 통합되어 갔다. 친일단 체가 출현하자, 한국인 사이에는 반일反日‧반일진회反一進會 투쟁이 나타 났다. 1904년 12월 보부상들과 일진회에 참여하지 않은 독립협회 출신들 이 제휴하여 공진회共進會를 결성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공진회가 일진회를 해산시키려 노력하였지만, 오히려 일본군의 개입으로 1905년 1월 6) 사립학교령이 반포된 후 학부에 청원한 수는 경북지역 사립학교 수는 경북 지역 155개교였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수의 학교가 인가를 받았는지는 명 확하지 않다(《皇城新聞》1909년 5월 8일자, ‘私立學校認許數’). 이보다 1년 후인 1910년 5월 현재 경북지역에서는 150개교가 인가되었다(《皇城新聞》 1910년 6월 18일자, ‘學校統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