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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1910년대의 독립운동 / 143 본인 지주를 앞세워 국내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일제는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품종개량사업을 강행했다. 일본 내 에 필요한 쌀‧면화‧양잠의 품종을 개량하고 이들 품목을 증산해, 저렴한 가격으로 수탈하기 위해서였다. 쌀은 일본인의 식량을 위해, 면화와 고치 는 일본의 공업원료로 사용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제 는 보다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 나아가서는 농민에 대한 지배체제를 강화 하기 위해 ‘농업단체’를 조직했다. 농업단체 가운데 일제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지주회와 면작조합‧양잠조합의 설립이었다. 청송군에서도 이러한 조합들이 설립되었다. 1910년대 청송의 사회경제상황을 알려주는 자료는 많지 않다. 우선 경 상북도에서 간행한 경상북도통계연보 를 통해 1917년 청송의 모습을 살 펴보고자 한다. 1917년 청송군의 총 가구수는 10,583호, 인구수는 53,562명 이었다. 이중에서 일본인이 43호로 총 호수의 0.4%를 차지하고 있다. 1917년까지도 청송지역에는 일본인의 침투가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표-2] 1917년 청송군 거주민 직업구조 구 분 전 체 (호/인구) 농 업 공 업 상업 및 교통업 공무 및 자유업 기타 무직자 계 10,583호 (53,562명) 9,429 (48,679) 74 (358) 851 (3,770) 136 (418) 75 (269) 18 (72) 한국인 10,540호 (53,423명) 9,428 (48,673) 73 (356) 843 (3,734) 107 (330) 71 (258) 18 (72) 일본인 43호 (139명) 1 (2) 1 (2) 8 (36) 29 (88) 4 (11) - * 자료 : 경상북도, 경상북도통계연보 , 1918, 46-62쪽. 청송군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직업구조를 살펴보면 농업자가 9,429호, 공업자 74호, 상업 및 교통업자가 851호, 공무‧자유업이 136호, 기타 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