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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 청송의 독립운동사 6) 1908. 2. 19, 柳時榮의 部下라 자칭하는 匪徒 12명이 眞寶郡 西面 釜谷洞 에 왔다가 안동군 동산령 방면으로 향해 사라졌다고 한다(9권, 421쪽). ◦진보 또는 안동 임남 부근에 있을 것이다(10권, 56쪽). 유시연부대는 일월산을 중심으로 각처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유시 연부대는 주로 안동‧영양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진보 및 청송지역에 출몰 하여 군수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1908년 2월말부터 일본군경의 의병에 대한 토벌작전이 감행되자 일월 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신돌석은 영해, 김성운은 울진, 유시연은 영양‧ 안동지역으로 흩어졌다. 유시연부대의 경우에는 각처에서 유격전을 감행 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으나, 지속적인 일본군경의 토벌작전에 큰 타격을 받고 그 세력이 점차 위축되어 갔다. 1908년 3월 이후 유시연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지만, 1910년 2월 안동경 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일시 종적을 감추어 양행洋行 또는 사망하였다는 풍평風評이 돈 유시영柳時榮은 목하目下 의식에 궁窮하여 물론 부하 일인一人 도 없고 보통 한복을 전纏하고 이삼책二三冊의 서적을 보자기에 싸서 휴대하 고 진보 영양 양군兩郡을 배회하고 있는 형적이라 수사중이라 한다’239)는 기록으로 볼 때, 활동을 중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1년 유시연은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룡‧김동삼 등과 같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2년 군자금 및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입국하여 활동하던 중, 1913년 8월 영주 반구시장에서 피체되었다. 1913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4년 1월 29일 대구감옥 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240) 239) 國史編纂委員會, <慶北高秘收 第156號 隆熙4年(1910) 2月 5日, 安東警察署 長 報告>,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7(義兵篇 Ⅷ), 정음문 화사, 1983, 220쪽. 240) 李東英, 「義兵大將 柳時淵先生」, 韓國獨立有功志士列傳 , 六友堂紀念會,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