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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29 ⑤ 유시연부대 을미의병시 안동의진의 권세연과 남한산성의진의 김하락에게 가담하였 던 유시연은 안동군 임동면 대평동 출신이다. 유시연은 1906년 봄 경주 분 황사에서 열읍 의병대표와 회맹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어 주로 안동‧청송‧ 진보‧영덕‧평해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2월 예안분파소의 습격을 비롯하여 진보 추현‧기곡 등지에서 30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활동하였다. 이때 이강년의 요청으로 그를 만 나기 위해 삼척으로 갔으나, 친일파 박두일朴斗日의 계략에 빠져 군졸들이 흩어지자, 격분하여 울진 십이령十二嶺에서 박두일을 사살하였다. 1907년 12월 이후 일월산을 중심으로 영양‧안동‧청송‧영덕 등지에서 신돌석‧김성운 등과 연결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7년 12월부터 1908년 2월까지 청송지역에서 전개한 유시연의 의병활동에 대해 일본군이 수집 한 정보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07.12.20 경, 유시연은 匪首 權某와 불합하여 私鬪한 결과 권은 유에게 구타당하고 그 부하 20여 명은 무기를 모두 유에게 빼앗겼다. 그리고 유는 부하 백명 이상을 이끌고 남하하여 청송 방면으로 향했 다(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義兵篇 I), 357쪽). 2) 1907.12.20, 진보군 基谷에서 유시연의 一團 약 50명과 충돌하여 드 디어 적을 격퇴하고 안동 편항방면으로 추격 중이다(8권 361쪽). 3) 1908.1.19 경, 유시영이 이끄는 一團의 화적은 진보군 내 각처에서 배회하고 있다. 그리고 안동군 臨南面 知禮洞(청송군境)에도 수괴 불 명의 화적 一團 약 200명이 숙박하고 점차 진보군내로 들어가려는 형적이 있다(8권, 558쪽). 4) 1908.1.21, 金谷(길안에서 3리)에 유시영을 비롯하여 270명의 화적이 숙박하고 있었다. ◦수괴 유시영은 150명 이상을 이끌고 의성방면으로 향해 도주하였으 나 이 또한 진보방면으로 우회하여 재차 합치려는 형적(8권 558쪽). 5) 柳時榮이 북방으로부터 壓迫을 받을 때는 늘 본군(의성) 龜山面, 點 谷面,玉山面, 청송군 縣南面, 안동군 吉安面, 臨西面, 臨南面 부근으로 脫走해 오는 것이 常例이다(9권,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