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page

128 / 청송의 독립운동사 청송군 도동道洞 김도파金道波로부터 엽전 20냥과 당목 1필, 동년 11월 초 3일 의병 12명과 화승총 6정을 휴대하고 청송군 천변리川邊里 조청운趙靑 雲으로부터 목면 2필, 그리고 동년 10월 5일에는 청송군 현서면 오음동梧 陰洞 동장에게 짚신 값 등을 군수품으로 강징하는 등 의성‧청송 등지에 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피체 후 강도죄로 기소되어 대구지방재판소 에서 징역 15년을 판결받고 복역하였다.236) 장학이(29세)는 성주군 가천면 가래곡家來谷 출신으로 1907년 박연백 부대에 참가하였다. 그는 박연백의 지휘 아래 의병 수십 명과 총기 20여 정 을 휴대하고, 1907년 9월 30일 의성군 춘산면 옥정동玉井洞 이약국에서 목 면 3필과 같은 날 밤 춘산면 소량동 所浪洞 민가에서 엽전 45량, 동년 10월 춘산면 언지동言旨洞에서 동장으로부터 의복대로 10냥과 춘산면 중리동中 里洞에서 10냥을 군수품 명목으로 강징하였다. 1908년 6월 이사옥李士玉 외 6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청송군 현서면 금수동 錦水洞에서 동민들 에게 식사를 제공받았고, 같은 달 의성군 사곡면 삼마동三麻洞에서 삼베 3필, 사곡면 공곡동孔谷洞 김서재金西齋로부터 목면 1필과 돈 3관을 군수 품 명목으로 강징하였다. 그외 1907년 10월 박연백과 의성군 사곡면 화 곡동禾谷洞에서 밀정으로 지목된 김명준을 사살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 개하였다. 그후 피체된 장학이는 살인 및 강도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 고 재판 결과 형이 확정되었다.237) 이와 같이 박연백은 처음 산남의진과 연결되어 활동하였으나, 입암전투 패전 이후 독자적으로 의성‧청송 등지에서 수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게릴라 식 전법을 구사하며 활동하였다. 1909년 11월 20일 박연백부대는 일본군의 증강으로 더 이상의 항쟁이 곤란함을 인지하고, 의진을 해산하였다.238) 236) 隆熙 3年 刑上 第64號 李新山 「判決」. 237) 張學伊 「判決」. 238) 國家報勳處,《獨立有功者功勳錄》 第1卷, 국가보훈처, 1986, 6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