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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27 명을 이끌고 의성군 사무소와 일경 분견소를 습격하였다. 한편 박연백부대는 1907년 12월 23일 청송군 화목면 소근리所斤里에 잠복 하면서 의성과 청송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하였다.233) 그후 박연백부대는 1908 년 1월 7일에는 청송군 현내면 당저동에 부하 30여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 는 등 의성‧청송 일대에서 일본군의 토벌을 따돌리며 항쟁하고 있었다.234) 한편 박연백부대의 의성출신 김반석‧이신산‧김선두, 성주출신의 장학이, 청송출신의 김수원 등도 청송‧의성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김반석(30세)은 의성군 춘산면 사미동思美洞 출신으로 1907년 7월 중에 박연백부대에 참여하였다. 1907년 8월 김반석은 안동군 송제동松蹄洞 부 근의 재곡齋谷 김파총金把摠의 집에서 수하와 함께 군수금 명목으로 쌀 3두 를 강징하였고, 1907년 8월(음 7월) 중 의성군 옥산면 광전동 廣田洞 김익 진金益震의 집에서 군수품으로 소 한 마리를 강징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 했다. 그 뒤 강진수姜鎭秀‧서종락의 휘하에 들어가 청송‧의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청송군 월매동月梅洞과 의성군 삼산면 진목동眞木洞에서 일 본군경과 충돌하였다. 그후 피체되었고, 폭동 및 강도죄로 기소되어 대 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235) 이신산(30세)은 의성군 춘산면 금동金洞 출신으로 1907년 9월 11일 박 연백부대에 참여하였다. 1907년 10월 14일 이신산은 의병 13명을 이끌고 朴淵伯 討伐狀況報告>,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義兵 篇 Ⅰ), 정음문화사, 1983, 359쪽. 233) 國史編纂委員會, <安警秘發 第444號의 1 隆熙元年(1907) 12月 28∼23日, 賊魁 朴淵伯 討伐狀況 報告>,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義兵篇 Ⅰ), 정음문화사, 1983, 359쪽. 234) 國史編纂委員會, <安警秘發 第21號 隆熙2年(1908) 1月 13日, 火賊狀況 報告>,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義兵篇 Ⅰ), 정음문화사, 1983, 548쪽. 235) 隆熙 2年 刑上 第28號 金盤石 「判決」,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문서번호 77-3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