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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 청송의 독립운동사 격문을 보내 각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의성 공산孔山에서 창의하였다.230) 1906년 7월 1일 일본군과 교전하여 죽창이나 나무막대기 등으로 신무기 에 대항하여 적 수 십명을 도륙한 뒤 기세를 올려 의성‧의흥‧영천‧청송 등지로 전전하면서 야간 기습과 화공혈전으로 일본군을 공략하였다. 박연백은 1907년 10월 산남의진의 창의장 정용기와 합세하여 입암전투 에 참여하였다. 1907년 10월 16일 산남의진의 창의장 정용기는 13도창의 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할 목적으로 북상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본 진 선발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죽장면 매현리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청송방면에서 입암으로 들어 왔고, 정용기의 산남의진 본대와 접전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정용기를 비롯한 핵심 부 장과 많은 의병이 전사한 후, 박연백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박연백부대의 활동지역은 주로 의성‧청송 일대였다. 그는 수하에 김반 석 金盤石‧장학이張學伊‧이신산李新山 등을 거느리고 있었다. 박연백과 그 수하들은 모두 소규모의 독자적인 부대를 거느리고 게릴라식 항전을 통 해 일본군에 대응하였다. 1907년 12월 19일 박연백부대는 의성군 금곡면 노매동에서 민가에 방화 하는 등,231) 의성군 춘산면 금동金洞‧공수동孔殊洞‧유동柳洞 등지에서 일본 군 토벌대와 접전을 벌이며 활동하고 있었다. 1907년 12월 25일에는 의성 군에서 일군 수비대와 전전하였고,232) 1908년 1월 25일에는 부하 100여 230) 박연백(1845∼ )의 자는 응구(應九)이며, 본관은 밀양박씨 주정공파, 부 광호 (光鎬)와 모 김해김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슬하에 3남 1여를 두었다. 그는 1906년 춘산면과 사곡면을 경계로 하고 있는 공산에서 창의하였는데, 공산(孔 山)은 현재 구무산이다. 과거 이 구무산의 골짜기 마을을 공실(孔室) 혹은 공곡(孔谷)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사곡면 공정리(孔亭里)이다. 231) 國史編纂委員會, <安警秘發 第90號 隆熙元年(1907) 12월 17일∼23일, 騷 擾損害調表>,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義兵篇 Ⅰ), 정 음문화사, 1983, 354쪽. 232) 國史編纂委員會, <安警秘收 第444號의 1 隆熙元年(1907) 12월 28일, 賊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