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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25 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어 1월 2일 밤 양구수비 대의 공격을 받아 70여 명이 사망하고 이인영 이하 200여 명이 부상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신돌석은 회진하고 말았다.227) 1907년 8월 한국 군대해산 이후 일본군의 의병토벌작전義兵討伐作戰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1908년까지 강원‧경상도지방의 의병부대 소탕이 대대적으로 행해졌다. 이에 따라 신돌석의진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으 나, 일본군의 의병 토벌작전에 대응하여 반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 의 추격전을 벗어났다. 신돌석의진은 1908년 5월부터 7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영해‧진보‧평해‧ 울진 등지에서 대부호 및 양반가에 대한 공격을 통해 군자금을 조달하고, 한편으로는 의병의 소모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 중에 일본군과 계속 된 접전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사상되고 체포되었으며, 귀순법歸順法의 고시 이후 의병들의 귀순이 늘어남으로써 의병부대의 전력은 매우 약화되었다. 1908년 10월 17일 울진군 분견소 헌병대와 전투를 마지막으로 신돌석 의진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11월 중순경 해산하였다.228) 그후 신돌 석은 만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1908년 12월 12일 영양군 지품면 눌곡의 황곡 상계에서 피살되었다.229) ④ 박연백부대 박연백은 의성군 춘산면 효선리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 후 사방으로 227) 金正明 編, 「韓國暴徒討伐誌」, 朝鮮獨立運動 Ⅰ, 174쪽; 國史編纂委員會, 「폭 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義兵篇 Ⅰ), 정음문화사, 1983, 422-423‧428-429쪽. 228)《大韓每日申報》 1908년 10월 31일자; <韓國暴徒蜂起의 件>, 독립운동사 자료집 별집 1, 부록 1117쪽. 229)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 푸른역사, 2001, 198-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