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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21 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6년 5월 이현규부대는 울진 죽변에 있는 왜관을 격파하고, 이어서 영양 북방의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역습으로 이현규는 부상을 입었고, 도포장 김대규는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크게 타격을 입은 이 현규부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그후 이현규는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에 은거하며 상처를 치료하고, 학동 70여 명을 모아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썼다. 1917년 2월 3일 총상의 여 독으로 죽었으니 향년 44세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212) ③ 신돌석의진 1906년 4월 6일(음 3.13)213) 창의한 신돌석의진은 1908년 10월까지 영 해‧영양‧평해를 중심으로 강원도 남부‧경북 북부, 나아가 충청북도 지역 에 걸쳐 활동하였다. 신돌석은 도곡陶谷에서 100명으로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기치를 걸고 창의한 뒤, 군수품을 조달하며 전열을 가다듬었다.214) 4월 29일 영 양읍을 점령하여 무장력을 강화하고 영양군 소계동에서 진영을 둘로 나 누어 일대는 일월산을 중심으로 청기‧일월 등지에서 활동하고, 일대는 신 212) 「奈山李鉉圭」, 義士奈山李夏玄先生記念碑 ; 金承學, 韓國獨立史 下卷, 1965; 朝鮮駐箚軍司令部, 朝鮮暴徒討伐誌 大正 2年(1908) 3月 10日; 國 家報勳處,《獨立有功者功勳錄》제1권, 啓蒙運動篇 및 義兵運動篇, 1986. 213) 1906년 3월 13일은 음력으로 盈德郡이 발간한 救國倡義錄 에 의거한 것이 며, 양력으로 환산하면 4월 6일이 된다. 申乭石將軍實記 에는 “丙午年 三 月”(음력)로 기록하고 있으며,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에는 “同年四 月下旬”(양력)부터 봉기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朴成壽는 踏査記 「申乭石將軍과 寧海」(《京鄕新聞》1989년 8월 19일자, ‘義兵戰爭’)에 서 1913년 3월 13일 陶谷에서 100명의 의병으로 창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214)《皇城新聞》 光武 10년 5월 12일자, ‘禦義請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