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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19 강진선은 1908년 1월 28일 경 의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의성군 사곡면 우평동牛坪洞에 들어갔는데, 그때 강진선부대의 의병은 흑색복을 입고 양 총 1정, 단발군총 1정, 천보총 1정, 화승총 20정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것 으로 보아 강진선부대는 해산군인이 다수 포함된 정예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강진선은 청송에서 의성을 거쳐 안동으로 갔다가 중순경에 다 시 안동에서 의성을 거쳐 청송으로 들어가는 등 주로 의성‧안동‧청송에 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의성군 사곡면 우평동에서 금 45량, 공수리孔殊里 에서 금 7량, 공곡리孔谷里에서 금 30량을 군수품 명목으로 강징한 후 안 동군 길안면 금곡 방면으로 이동하였다.208) 동년 2월 5일 강진선은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의성군 옥산면‧금곡면‧ 춘산면, 의흥군 소야면, 청송군 현서면 등지를 거쳐 청하 방면으로 이동 하였다. 이 때 일본군 수비대는 강진선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3면으로 나 누어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추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209) 그후 1908년 4월 24일 강진선은 청송군 현서면에서 의병으로 변장한 토벌대에 속아 피체되었다.210) 그는 일본군경의 심문에도 불구하고 부하 들의 소재를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살해됨이 당연하다. 청송군민은 모두 폭도이다. 왜 이를 처분하지 않느냐’하며 총 살을 요구하였다. 그는 결국 대구에서 총살되었다.211) 208) 國史編纂委員會, 安警秘收 第65號 隆熙 2年 2月 2日, <暴徒의 狀況報告>, 「폭 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9(義兵篇 Ⅱ), 정음문화사, 1983, 114쪽;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공훈록》제9권, 542쪽. 209) 國史編纂委員會, 警秘收 第310號의 2 隆熙 2年 2月 12日, <暴徒 討伐狀 況 報告>,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9(義兵篇 Ⅱ), 정 음문화사, 1983, 134쪽. 210) 國史編纂委員會, 第731號 隆熙 2年 5月 6日, <變裝巡査隊의 行動>,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0(義兵篇 Ⅲ), 정음문화사, 1983, 499쪽. 211) 國史編纂委員會, 大秘收 第867號 隆熙2年(1908) 5月 4日, <變裝巡査隊 行 動 報告의 件>, 「폭도에 관한 편책」,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10(義兵篇 Ⅲ), 정음문화사, 1983, 479-4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