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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 청송의 독립운동사 (소백산)‧박연백(의성)‧이춘양(봉화)‧박인화(안동)‧강진선(청송) 등이 경 북 북부지역, 권병호는 경산‧청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이후 일본군의 의병토벌작전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대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경상도의 이강년‧신돌석‧최세윤, 전라도의 고광순 등이 전 사하자 예하 부대장이었던 전성범(거창)‧유시연(안동)‧김상태(순흥)‧박연백 (의성)‧이춘양(문경)‧서종락(청송)‧이세기(청송)‧유종환(진주)‧권석도(함 양) 등은 소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유격전을 통해 항전을 계속하였다. 1908년 7월 산남의진의 최세윤이 전사하자 청송지구대를 이끌던 서종 락‧남석구‧이세기 등은 청송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유시연‧신돌 석‧박연백 등이 청송‧안동‧영덕‧영양 일대에서 게릴라적인 유격전을 감 행하였다. 일본군 수비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1907년말 이후 청송과 진보에서 활동 하던 의병부대는 적게는 3∼4명에서 수 십명, 많게는 100∼150여 명을 단 위로, 양총‧단발군총‧화승총 등의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신돌석‧유시연 등은 일월산을 유격근거지로 안동‧청송‧진보 등지에 출 현하였고, 박연백은 의성과 청송 일원을 출입하였고, 박인화(박처사)는 안 동 일원을 중심으로 청송‧진보‧영양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는 소백산 일 대에서 활동하던 김상태‧이춘양‧김성운‧변학기‧정경태‧성익현‧백남규‧정연 철 등이 대규모의 의병연합부대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는 상황과는 대비 되는 모습이다. 1909년 이후 각처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들은 일본군 수비대의 대규모 토벌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의병부대의 규모는 점차 축소되어 갔 고,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그 활동범위도 매우 넓어졌다. 더욱이 일본군 수비대의 토벌작전과 병행된 회유 및 귀순정책으로 의병 들은 점차 대오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청송‧진보지역의 경우에도 소위 ‘폭도귀순자暴徒歸順者’는 점차 증가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