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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 청송의 독립운동사 고와실전투에서 의병은 대패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서종락의병장 은 이곳에서 백석탄을 따라 물밑으로 30여리를 도망하여 목숨을 건진 뒤 보현산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의병은 양손발을 묶인 채 백석 탄에 널려 있는 물속의 바위에서 총살되었다. 강 양편에서 무장한 일본군 은 양손을 묶어 세운 의병을 향해 집중 사격하였다. 죽어가는 의병의 몸 에서 흐르는 피가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⑤ 산남의진의 해산과 청송지역의 동향 최세윤 대장이 1908년 7월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자, 산남의진은 그 구 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청송지역은 서종락과 남석구 등의 의 병부대가 유격전에 의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1910년 고와실전투를 끝으 로 의병들의 항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산남의진에 참가하였던 청송출신의 의병들은 피체되거나 귀순하였고, 1910년 국권상실에 직면하자 은거하거나 만주로의 망명을 택하였다. 일제 는 국권을 약탈하는 과정에서 의병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민족지사들을 폭 도로 규정하여 처 형하거나 투옥하 였다. 따라서 1910 년 국권상실과 함 께 국내에서 국권 회복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상 실하게 된 민족지 사들은 새로운 만 주의 독립군기지 < 고와실 전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