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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09 1908년 3월 이후 서종락과 남석구의 활동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일본측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와 산남의진유사 를 비교 하여 검토하면 투쟁상황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표-6] 산남의진 청송지구대의 활동 상황 朝鮮暴徒討伐誌 暴徒에 關한 編冊 山南義陣遺史 1908. 4. 16. 청송, 의병 40명, 전사 18명. 4. 15. 마아도시(청송 2리 지점), 폭도 400, 청송을 습격하려 함. 1908. 3(음) 청송 동진이 청송에서 적을 격퇴 1908. 4. 29. 청송 동방 약 30리 지점, 의병 62명, 사상 35명. 4. 29. 청송 동방 3리, 의병 62명, 전사 15, 부사 20, 포로 3. 1908. 3(음) 청송 동진이 청송에서 적을 격퇴. 1908. 6. 20. 청송 남방, 의병 약 60명, 전사 15명 4. 26. 현서면 복기동, 의병 60, 사상 15명 1908. 3(음) 청송 서진이 현서에서 적을 격퇴. 1908. 7. 11. 청송 동북 약 30리 반 지점, 의병 약 30명, 전사 12명. 1908. 6(음) 청송 동진이 청송에서 적을 격퇴. 서종락이 이끄는 청송 동진東陣은 1908년 4월 이후 주왕산을 중심으로 청송읍과 부동면 그리고 부남면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였다. 최세윤 대 장이 1908년 7월 장기 용동 龍洞에서 피체되자, 산남의진은 그 구심력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청송지역은 서종락과 남석구 등의 의병부대가 유격전을 계속하였고, 이세기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동대산 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09년 피체되었다. 그후 서종락(1908. 10. 26)‧ 김사곡(11. 2)‧윤상촌尹裳村(1909.4.5) 등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체포되 거나 귀순함으로써 의진은 점차 해체되어 갔다. 산남의진의 지역부대인 청송진은 1910년 고와실전투를 끝으로 해산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