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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장 의병항쟁 / 101 을 보내 북상을 준비시키고, 각 영장營將에게 그 부하를 각지에 파견하여 군 복을 준비하여 북상토록 하였다. 그리고 정용기는 장령 이하 100여 명을 거느리 고 죽장 등지에서 소모활동을 하던 중 8월 29일 매현梅峴에 유숙하였다.198) 8월 30일 진중의 대장기 2대가 동시에 전복되니 모두 놀랐다. 그날 저 녁 무렵 적병이 청송에서 출발하여 입암에 도착하였다는 척후의 보고가 있었다. 이때 모든 부대는 각 지역으로 파견되었기에 김일언‧ 우재룡‧이세 기의 부대만이 남아 있었다. 이에 우재룡은 작령雀嶺, 김일언은 명암鳴巖, 이세기는 광천廣川에 매복하기로 하였다.199) 그런데 입암 뒷산을 경유하여 광천으로 매복을 나가던 이세기는 마침 입 암에 들어와 저녁을 먹고 있는 일본군을 염탐하게 되었는데 그 수효가 많지 않아,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인근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포 위되어 공격을 받다가 간신히 도주하였다. 이때 매현에서 출전 준비를 하던 정용기는 입암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를 듣고 입암으로 출발하였다. 정용기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그믐밤에 부대를 이동하여 입암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입암에 들어서면 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고, 전투는 밤을 세워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9월 1일 날이 새자 비극의 현장은 처참하게 드러났다. 수많은 의병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이한구‧ 손영각‧권규 섭 등의 지휘부가 전사하였고, 그외 장대익‧지용이‧손영준 등도 전사하였 다. 또 참상을 보고 놀란 입암리 주민 안동권씨 집안의 원로 10여 명은 일본군의 만행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려 보려고 일본군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갔으나 참살되고 말았다.200) 정용기가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전사하자 산남의진의 북상계획도 연기되었다. 198) 山南倡義誌 下, 25쪽. 199) 山南倡義誌 下, 25-27쪽. 200) 山南倡義誌 下, 26-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