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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청송의 독립운동사 당시 산남의진의 목표는 서울진공작전이었다. 이미 정용기가 석방되어 정환직을 비롯한 의진의 요인들과 재기를 모의하는 자리에서 산남의진이 강릉지방에서 서울부대와 합류하도록 약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약 속을 8월 하순까지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남의진은 신돌석이 관동지방으로 진출하여 서울진공작전에 쉽게 참 가하도록 배후에서 일본군을 견제코자 하였다. 먼저 포항‧흥해‧청하 등을 공략하고, 청송‧신녕 등지를 거쳐 8월 3일 자천으로 들어갔다.194) 그후 산남의진은 안동으로 들어가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청송 노구재를 거쳐 의흥‧의성‧안동 등지를 거쳐 청송 안덕으로 들어갔다. 이때 산남의 진은 일본군이 청송읍에서 안덕을 향해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성전투는 1907년 음력 8월 14일 추석 전야에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 들이 추석 명절에는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마을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추강 뒷산에 매복하였다. 14일 저녁에 안덕 신성 薪城에 도착한 산남의진은 부대를 3대隊로 나누어 진을 쳤다. 의진은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본군을 3대로 포위하고 혈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파수 이치옥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몰아치는 폭풍은 화승총을 사용해야만 했던 의 진의 전투력을 격감시켰다. 의진은 포위를 풀고 죽장竹長으로 들어갔다.195) 그후 산남의진은 8월 24일 영천 자양전투, 25일 검단전투 등에서 수차 례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이때 산남의진의 청송지역 유격대는 서종락이 이끌고 있었다.196) 1907년 8월 25일 야간회의에서 정용기는 10일간의 준비기간을 가진 후 9월 초 북상하기로 결정하였다.197)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격대에 사람 194) 山南倡義誌 下, 22쪽. 195) 山南倡義誌 下, 23쪽. 196) 山南倡義誌 下, 24쪽. 197) 山南倡義誌 下,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