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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 청송의 독립운동사 八十兩하고 仍往興海郡水栗洞鄭邊洞家하야 奪錢八十兩하고 該洞李進士 家에 錢三十兩鳥銃三柄奪取하고 六月日 興海鄭士弘不合하야 被告는 率 砲軍二十餘名 入于靑松普賢山中하야 以待秋成타가 久住不利이기 向發 盈德立巖하야 募集砲軍次로 轉到淸河下玉溪留屯이라가 同十九日에 見 逐於巡檢來擊하야 避走在家타가 同二十日被捉於巡檢하엿고 白南壽....... (이하생략)191) 남석인이 피체된 후 청송지역에는 정순기와 이종곤이 파견되어 의병 을 모집하였다.192) 1907년은 의병전쟁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되는 시기로 7월 19일 고종의 강제퇴위와 7월 31일 한국군대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위기의식은 더욱 가 중되었다. 1907년 7월 이후 우재룡在龍‧김성일金聖一‧조선유趙善裕‧김치현 金致鉉‧은순택殷淳澤 등 수 십명의 진위대 군인들이 청송에 주둔하고 있던 산남의진에 입진入陣하였다.193) 이리하여 산남의진의 진용은 재편성되었다. 더욱이 해산군인들이 의진에 합류함으로써 의병활동은 전환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청송지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部 署> ◦大 將 鄭鏞基 ◦中 軍 將 李韓久 ◦參 謀 將 孫永珏 ◦召 募 將 鄭純基 ◦都 總 將 朴泰宗 ◦先 鋒 將 洪龜燮 ◦後 鋒 將 李世紀 ◦左 營 將 權圭燮 ◦右 營 將 李圭弼 ◦練 習 將 趙善裕 ◦都 炮 將 白南信 ◦左 翼 將 鄭來儀 ◦右 翼 將 金聖一 ◦左 炮 將 張大翼 ◦右 炮 將 金一彦 ◦遊 擊 將 林中虎 ◦點軍檢察 安守元 ◦斥 候 將 鄭成郁 ◦將營執事 金震榮 ◦軍門執事 李斗圭 191) 대구지방법원, 「判決宣告文」, 刑事裁判書原本 . 192) 山南倡義誌 下, 20쪽. 193) 山南倡義誌 下,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