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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21 인과의 관계 속에서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조직을 결성했다. 이어 서 그 아래 상남면 마산리 인근에는 <그림 1>의 ㉯와 같이 밀양강과 낙동 강의 범람을 막고자 조성된 수리시설을 토대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 규모 토지가 위치했다. 이 두 지역의 토지는 일본인 대지주 및 동척 소유 지로 일부 일본인들의 자작지를 제외하고 대부분 밀양면과 상남면 등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의해 소작되었다. 10) 뿐만 아니라 경부선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 가곡동에 일본인 시가지가 조성되었고 점차 삼문동을 거쳐 밀양강을 넘어 밀양 읍내로까지 일본인 들의 영역이 확장되었다. 11) 밀양 읍내에는 인근 지역은 물론 멀리 인천 으로부터 물류가 모이는 밀양시장이 섰기 때문에 이곳의 물자를 밀양역 을 통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동하기 위한 상업활동이 일본인들에 의 해 추진되었다. 12) 따라서 일제시기 이미 밀양 읍내에는 일본인 회사, 상 점 등이 진출하고 있었다. 경남에서 일본인거류지가 있었던 부산과 마산 을 제외한 내륙지역 중 통영, 진주, 밀양에 일본인 진출이 가장 많았던 점 도 이 때문이었다. 13) 이처럼 일본인들은 이른 시기 밀양지역의 철도역을 중심으로 농촌지역에 진출했으며 뒤이어 점차 읍내지역까지 영역을 확 장하여 조선인과의 사이에서 갈등이 크게 고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1919년 전국적으로 전개된 3·1운동이 밀양지역에서도 대대적이고 연속 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14) 10) 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ꡔ朝鮮五万分一地形圖: 密陽ꡕ, 1924 ; 최원규, 「日帝의 初期 韓國植民策과 日本人 ‘農業移民’」, 726~733쪽. 11) 1914년 현재 일본인은 밀양성내, 삼문, 밀양역 앞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慶 尙南道, ꡔ慶尙南道案內ꡕ, 釜山時報社, 1914, 156~157쪽). 12) 朝鮮總督府鐵道局, ꡔ朝鮮鐵道沿線市場一覽ꡕ, 1912, 46~47쪽. 13) 물론 1920년대로 넘어가면 진주, 방어진 등 다른 지역의 일본인 거주가 늘어나면서 밀양군내 일본인 거주는 정체하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1913년 현재 밀양군 전체에 일본인은 2,636명이 거주했으며, 밀양읍에만 1,048명이 거주했다. 이후 1920년대 전 반에도 밀양군 전체에 2,500명 내외, 밀양 읍내에 1,000명 내외의 일본인이 거주했다 (慶尙南道, ꡔ朝鮮總督府慶尙南道道勢要覽ꡕ, 1913, 15~19쪽 ; 釋澤春芿, ꡔ最新朝鮮地 誌ꡕ中篇, 朝鮮及滿洲社, 1918, 70~74쪽 ; 慶尙南道, ꡔ朝鮮總督府慶尙南道統計年報ꡕ, 1921·1923, 3쪽·7~11쪽 ; 慶尙南道, ꡔ道勢一班ꡕ, 1922·1924, 5~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