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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55 밀양의 경우 개항 이후 낙동강과 경부선을 통한 일본인들의 내륙 진출 과 더불어 대대적인 이주농촌 건설 및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침탈로 식 민화가 가중되었던 곳이었다. 밀양면과 가까웠던 상남면 일대는 동양척 식주식회사의 대규모 토지가 위치하는 곳으로 대부분의 조선인 마을은 이 토지의 소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 한 밀양면 기산리 인근에는 湯淺凡平에 의해 조성된 이주농촌이 조성될 정도로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침탈이 심화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 부선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시가의 조성과 전통적인 밀양 읍치로 의 확장에 따라 일본인과 조선인의 갈등이 크게 고양되었으며 이 때문에 두 지역에서는 대대적인 삼일 운동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의열투쟁의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투쟁으로 나타 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 조건과 함께 주관적 조건도 결부되어야만 역 사적 사건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부산과 밀양지역의 주관적 조건 은 의열투쟁과 관련된 구성원들의 연결망을 통해 두드러진다. 부산과 밀 양 두 지역의 의열투쟁 관련자들은 혈연관계로부터 시작하여 학연으로 까지 확장되어 긴밀한 관계를 어릴 때부터 유지하고 있었다. 밀양의 경 우 김원봉, 윤세주, 윤치형, 한봉인, 한봉근 등의 친인척 관계는 물론이 고,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를 통한 학연관계가 드러나며 부산의 경우 직접적 혈연관계는 없지만 박재혁, 최천택, 오택 등이 의형제를 맺 고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고 모두 육영재, 부산상업학교 등을 통한 학연관계였다. 또한 이러한 혈연과 학연은 지역의 객관적 조건과 결부되 면서 그 공간에서 일합사, 연무단, 구세단 등 항일조직의 결성과 다른 지 역조직과의 연대 등 긴밀한 연결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별히 비밀성과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의열투쟁은 운동의 진행상 관련 인사들의 협 력은 물론이고 공고한 연대가 필수적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어린 시절부 터 이웃하며 관계를 맺어온 혈연·학연·지연의 공고한 관계 속에서 독 립운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명분을 통해 스스로 독립투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