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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과 더불어 대대적인 이주 농촌 건설 및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침탈로 식 민화가 가중되었던 곳이었다. 예를 들어 밀양면과 가까웠던 상남면 일대 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대규모 토지가 위치하는 곳으로 대부분의 조선 인 마을은 이 토지의 소작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또한 밀양면 기산리 인근에는 湯淺凡平에 의해 조성된 이주농촌 이 조성될 정도로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침탈이 심화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경부선 밀양역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 시가의 조성과 전통적인 밀 양 읍치로의 확장에 따라 일본인과 조선인의 갈등이 크게 고양되었으며 이 때문에 대대적인 3·1운동이 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이상 과 같이 부산과 밀양은 일제의 침략에 따른 갈등의 심화가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적 조건은 식민지 조선의 대부분 지역에서도 공통 된 점이었고 이 때문에 3·1운동은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일어났던 것이 다. 따라서 객관적 조건 이외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주관적 조건 이다. 이미 본문에서 상세히 언급하였듯이 두 지역은 의열투쟁과 관련하 여 그 구성원들의 연결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들은 혈연관계로부터 시작하여 학연으로까지 확장되어 긴밀한 관계를 어릴 때부터 유지하고 있었다. 밀양의 경우 김원봉, 윤세주, 윤치형과 한봉인, 한봉근 등의 친인 척 관계는 물론이고, 밀양공립보통학교와 동화학교를 통한 학연관계가 드러났다. 부산의 경우 직접적 혈연관계는 없지만 박재혁, 최천택, 오택 등이 의형제를 맺고 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고 모두 육영재, 부산상 업학교 등을 통한 학연관계였다. 또한 이러한 혈연과 학연은 지역의 객 관적 조건과 결부되면서 그 공간에서 일합사, 연무단, 구세단 등 항일조 직의 결성과 다른 지역 항일조직과의 연대 등 긴밀한 연결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별히 비밀성과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의열투쟁은 운동의 진행상 관련 인사들의 협력은 물론이고 공고한 연대가 필수적이었다. 때 문에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웃하며 관계를 맺어온 혈연, 학연, 지연의 공고한 관계 속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명분을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