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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49 4 . 글을 맺으며-부산경남지역 의열투쟁의 지역적 의미 부산경남지역의 의열투쟁이 일어난 현장을 통해 지역적 의미를 살펴 볼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객관적 조건인데, 일제의 탄압 또는 차별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에 대한 저항의 반작용도 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객관적 조건이 성숙되었다고 반드시 역사적 사 건(의열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주관적 조건도 결부되 어야만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산 경남지역 특히 의열투쟁이 전개된 부산과 밀양은 어떤 객관적 조건하에 있었을까. 개항과 더불어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불어왔지만 부산진 조선인 마을 은 여느 조선인 마을과 마찬가지로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이웃의 초량 조선인 마을은 일본인 진출로 발전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일부의 조선인들은 상공업자로 성장하였지만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자신의 토지 로부터 유리되어 영주동이나 부산진 조선인 마을로 밀려났다. 또한 부산 궤도주식회사의 경편철도가 부산진성으로부터 동래까지 부설되었을 때 부산진 조선인 마을은 그 선로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배제되었다. 한편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부산 항은 점차 일제의 ‘대륙 관문’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며 도시공간을 확장하기 위한 매립과 매축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부산진은 일제시 기 내내 그 매립과 매축의 중심지였고 이를 통해 새롭게 조성된 토지는 대대적인 물류유통의 중심지 및 공업지구로 확장되면서 조선인 마을은 점차 그 배후이며 유통과 공업지구의 조선인 노동자 거주지구로 심화되 었다. 이처럼 일제의 식민화와 더불어 조선인 마을은 식민도시 부산에서 조차 변방, 변두리로 배제되었던 것이다. 밀양의 경우 개항 이후 낙동강과 경부선을 통한 일본인들의 내륙 진출 64) ꡔ동아일보ꡕ 1921년 5월 17일 「大邱에 收監中인 朴在赫은 病死, 屍體는 古舘驛에 到 着, 寡婦의 獨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