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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비록 폭탄 투척이 순조롭지 못해 자신도 심대한 부상을 당했지만 일제 권력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부산경찰서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충 격적인 사건이었다. 부산경찰서는 또한 부산부청과 인접해 있어 당시 식 민권력자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부산경찰서 형사 들은 동분서주 폭파 현장을 뛰어다니며 닥치는 대로 주위의 행인들을 검 거하는 한편, 즉각 부산지방법원 검사들이 조사에 착수하고 연이어 이미 여러 차례 함께 활동했던 인사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용두산공원 에서 박재혁을 기다리던 최천택은 박재혁이 경찰서에서 나오지 않자 거 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가 체포되었고 오택, 김영 주 등도 자신의 집 근처에서 동시에 검거되었다. 한편 오사카마이니치[大 阪每日], 오사카아사히[大阪每日] 양신문은 부산경찰서 투탄의거 소식을 전하며 조선인과 일본인 양 민족의 융화는 근본적으로 실패라고 비난하 는 내용을 대서특필하며 부산이라고 하는 공간을 도쿄 또는 오사카와 동 일시하며 ‘일본인들의 공간’에서 이러한 폭탄 사건이 난 것을 매우 충격 적인 일이라고 했다. 62) 그 정도로 식민지 조선에서 부산이라고 하는 지 역이 지니는 의미는 다른 지역과 남달랐다. 현장에서 체포된 박재혁은 부상으로 인해 인근의 부립병원으로 옮겨졌고 치료 후 부산형무소에 수 감되었다. 63) 이후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박재혁은 ‘왜놈 손에 사형 당하기 싫어 단식 중’에 기진하여 1921년 5월 11일에 순국했다. 박재혁의 시신은 경부선을 이용하여 5월 14일 고관역으로 옮겨졌고 근처 부산진 매축지 공터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소요사태’를 두려 워하여 남 2명, 여 3명만 장례식에 참가토록 하였으며 인부 2명에 의해 쓸쓸히 부산진 공동묘지에 묻혔다. 64) 61) ꡔ부산일보ꡕ 1920년 9월 14일(호외) 「釜山署の爆彈騷ぎ」. 62) 권오현, ꡔ어둠을 밝힌 사람들ꡕ, 174쪽. 63) 1921년 당시 부산형무소는 서대신동 서부경찰서 뒤편 근처로 추정되며(1919~1922년 사이의 부산을 표시한 ꡔ부산부근ꡕ지도 참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금의 동대신 동 삼익아파트자리로는 당시의 형무소가 협소하여 1923년 4월에 이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