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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부산은 제2의 오사카였을 뿐만 아니라 ‘대륙의 현관’이며 ‘대륙의 인후’였 기에 조선의 일본이었고 또한 일본에서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부산을 거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부산항 부두는 일본의 황실인사는 물론이고 조선 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급관료, 지방 관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 부임하는 외교관 및 군관료 등 수많은 일본의 권력자들이 드나들며 대대적인 환영행사가 벌어지던 공간이었다. 또한 그러한 식민권력자들은 바쁠 경우에도 바로 경성 또는 중국으로 가지 않 고 열차시간에 맞춰 부산 시내를 유람하거나 철도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경우에는 부산시내 또는 동래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고, 아예 며칠 또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머무르며 정양하는 경우도 있었다. 56) 3·1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도 또한 부산항 을 통해 조선에 발을 내딛었다. 따라서 박재혁의 심중을 이해한 오택은 박재혁과의 만남 이후 줄곧 ‘국문신문 등 외에 일문(日文)지 각종을 구독 하여 요인 왕래와 총독을 매일 조사’했던 것이다. 박재혁이 부산으로 들 어와 일주일 이상을 위장 요양하며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거물급 타격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시기가 점점 길어 지고 일제의 포위망이 차츰 좁혀지자 거사의 실패를 우려한 나머지 부산 경찰서를 타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57) 1920년 9월 초 부산에 들어온 박재혁은 가져온 폭탄을 오택의 집에 보 관하고58) 타격 대상과 의지를 추스르고 거사 계획을 은폐하기 위해 최천 택, 김기득, 박창수 등 친구들과 동래, 해운대, 범어사 등을 유람하며 지 냈다. 9월 13일 최천택과 함께 타격 대상을 부산경찰서로 정하고 부산경 찰서가 내려다보이는 용두산공원에 올라 주위를 살피는 한편, 함께 기념 56) ꡔ부산일보ꡕ 1916년 12월 9일 「長谷川總督の着釜」 ; ꡔ부산일보ꡕ 1917년 4월 28일 「藤 田師團長動靜」 ; ꡔ부산일보ꡕ 1917년 11월 8일 「松川中將來釜」 ; 「南大門 驛頭日記, 齋藤前總督手記」, ꡔ삼천리ꡕ 제8권 제11호, 1936. 57) 김삼근, ꡔ부산출신독립투사집ꡕ, 119쪽. 58) 친구 최천택의 숙모였던 변금봉 여사의 집에 숨겨두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삼일동 지회 편, ꡔ釜山慶南三一運動史ꡕ, 1979, 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