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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45 던 김병태는 이미 김원봉과 의열단 결성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고, 이후 김원봉과 함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봐 함께 접촉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원봉은 의열단 결성 이후 처음으로 계획한 거사가 일제의 감시망에 포 착되어 대부분의 의열단원들이 일제의 검거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다른 의거를 추진하기로 하고 박재혁과 협의하여 거사에 들어갔다. 박재혁은 김원봉이 전해준 폭탄 1개, 군자금 300원, 여비 50원을 수령한 후, 상해에 서 나가사키와 쓰시마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왔다. 이미 부산항의 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검문검색이 심한 관부연락선을 타지 않고 우 회하여 들어왔던 것이다. 54) 부산이라고 하는 공간은 물론 박재혁이 나고 자란 곳이라 속속들이 잘 아는 장점도 분명히 있었다. 특히 의열투쟁과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전 개되는 독립운동의 경우 대상 지역에 대한 이해와 타격 대상에 대한 정 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 지역적 의미는 심 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부산이라고 하는 공간이 지닌 또 다른 지역적 특징이 있었다. 오택의 유고에 의하면 박재혁은 처음부터 김원봉 의 지시와 달리 부산경찰서를 타격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지는 않다. 왜 냐하면 1920년 9월 14일 투탄 당일까지 일주일 정도를 친구들과 어울리 며 위장 유람 중이었고 이 과정에 타격 대상을 논의하고 고민했던 것 같 다. 그리고 14일 오택에게 맡겨둔 폭탄을 건네받을 때 “차일피일하는 동 안에 만일 사건이 발각이 되면 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악형만 남 을 것이니 차라리 대상의 대소를 불구하고 나의 결심을 단행하는 것이 본의라고 단정을 내리고 말았다”고 박재혁이 말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도 이점은 틀림없을 것이다. 55) 그렇다면 부산이라는 공간의 또 다른 지역적 특징은 무엇이었을까. 부 산은 일제의 입장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현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 으로 진출하는 가장 중요한 출입구였다. 당시 일본인들의 표현에 의하면 54) 부산경찰서, 「부산경찰서 폭탄 투하에 관한 건」(高警 제31192호), 1921. 55) 김삼근, ꡔ부산출신독립투사집ꡕ, 1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