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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지 치루지 못하게 했다. 53) 2) 부산경찰서 투탄의거와 현장 첫 번째 의거가 일경에 발각되자 김원봉 등 의열단은 곧바로 다음 의 거를 준비했다. 부산 범일동에서 태어난 박재혁은 부산상업학교 시절 최 천택, 오택 등과 비밀결사 구세단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이러한 가운데 김원봉과 이미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처럼 밀 양과 부산 등 동부 경남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은 한일강제병합 이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이미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가운데 1차 밀양·진 영폭탄사건이 일제에 발각되어 새로운 타격 대상을 물색하고 있던 김원 봉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민하던 박재혁이 만나게 된 것이다. 박재혁은 부산진의 형제와 같은 친우들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각종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가운데 부친의 죽음으로 일단 가사를 책임지 기 위해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에 취직했다가 이내 그만두고 친척이 경 영하는 경북 왜관의 곡물무역상이 되어 1917년 6월 상해로 건너가 무역 업에 종사했다. 이때 동료인 김인태와 함께 상해로 건너갔고 김인태는 상해에서 김원봉 등과 관계를 맺으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박재혁은 가 사 일을 핑계로 바로 관계를 맺지 않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1920년 4월경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해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일단 가사 일을 핑계로 거절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 다. 동년 8월 다시 상해로 건너갈 때 김원봉은 박재혁의 친구인 김병태의 명의로 김영주에게 여비 100원을 건네 박재혁을 상해로 건너오게 하고 재차 만나 가입을 권유했다. 박재혁은 결국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 던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사르고자 이에 응했다. 김원봉과는 이미 구세단 시절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쉽사리 접촉할 수 있었다. 함께 상해에 있 53) ꡔ동아일보ꡕ 1921년 8월 3일 「死刑囚屍體를 護喪한 罪」 ; ꡔ동아일보ꡕ 1921년 8월 21일 「死刑囚屍體를 歡迎한 밀양청년 삼십 명은 마침내 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