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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가곡동을 지난 지점에 위치한 일제의 감시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 었다. 또한 일제의 탄압기구와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밀양읍내와 밀 양역이 있는 가곡동과 달리 조선인 마을이 있는 곳으로 김상윤이 나고 자란 곳이었다. 48) 또한 최수봉은 1894년 경남 밀양군 상남면 마산리에서 태어나 밀양공 립보통학교와 사립 동화학교를 다니며 김원봉 등 의열단원이 된 수많은 밀양 출신의 동료들과 함께 항일의식을 키웠고 오랜 기간 독립운동에 뜻 을 두고 있었다. 최수봉이 태어나 살던 마산리는 기산리로부터 한참을 더 들어가야만 되는 벽지 농촌 마을로 최수봉이 학교를 가거나 밀양읍내 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거쳐야만 하는 곳이 기산리였다. 49) 아마도 그날 최수봉은 제1차 계획의 누설로 검거된 자신의 친구들과 아직도 검 거되지 않은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읍내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 는지도 모른다. 사전 연락에 의해서든 그렇지 않고 우연찮게 만나게 된 것이든 이미 친분을 가지고 있던 김상윤과의 만남은 수많은 친구들의 검 거 소식에 크게 분개하고 있던 최수봉의 의열단 가입으로 이어졌고 이들 은 곧바로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계획했다. 이종암과 김상윤은 국외 망명 시절 폭탄제조법을 배웠던 밀양의 고인 덕을 소개받아 의열단에 가입케 하고 밀양 외곽 산속에서 폭탄을 제작하 게 했다. 그리고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渡邊末次郞)가 매주 월요일 아 침 관내 순사들을 소집하여 훈시하는 순간을 노려 거사 일을 1920년 12월 27일로 잡았다. 밀양경찰서는 밀양 시장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의 왕래가 잦았다. 또한 최수봉은 어려서부터 동화학교를 다니며 그 도 중에 있는 밀양 시장을 수도 없이 왕래했기 때문에 전혀 문제없이 밀양 경찰서까지 진입할 수 있었다. 전날 강 건너 삼문동에서 폭탄 2개를 건네받은 최수봉은 27일 아침 홀 48) 조선총독부 아세아국 제2과, ꡔ요시찰인명부ꡕ, 1925 ; 육군성, 「밀양경찰서에서의 폭 탄범인 검거」(高警 제873호), ꡔ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3)ꡕ, 1921. 49) <그림 1>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