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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모의 폭탄의거인 두 차례의 ‘암살파괴계획’(밀양폭탄의거와 ‘경북의열단 사건’)과 두 차례의 경찰서 투탄의거(부산경찰서 및 밀양경찰서 투탄의 거)였다. 의열단은 경남지역에서 전개된 의열투쟁 외에도 앞에서 언급한 수많은 의열투쟁을 계획, 실행하며 활발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경남을 제 외한 경성 및 국외에서의 개별적 의열투쟁은 지역과의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한계에 봉착했고 더 이상 개별적인 의열투쟁 으로는 3·1운동과 같은 전민중적 항거를 일으킬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 했다. 한편, 새로운 투쟁방향의 정립을 위해 이후 민중의 혁명역량에 토 대를 둔 조직적인 무장투쟁노선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지도부 자체가 국외에 있었기 때문에 초창기와 달리 국내 지역과의 연결이 점차 의열단원들의 검거로 인해 약해져 갔고 더 이상 국내 지역과의 연결을 시도할 인적 자원을 충당하지 못함으로써 국외 현지와의 관계를 통한 새 로운 독립운동방법론으로 전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기존에 추진한 의열투쟁의 방법을 버리고 무장투쟁을 위한 군대조직과 국내의 민중과의 연대투쟁을 위한 방향으로 전화해갔다. 1) 밀양·진영 폭탄사건 및 밀양경찰서 투탄의거와 현장 의열단의 의열투쟁은 창립 멤버들의 구성을 통해 볼 때 지역적 연고가 있는 경남지역이 가장 유력했고 이 때문에 최초의 의열투쟁 계획(‘제1차 암살파괴계획’)도 밀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일명 ‘밀양폭탄사건’ 또는 ‘진영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후에 ‘제1차 암살파괴 계획’으로 붙여진 밀양폭탄사건은 밀양과 진영에 직접 제조한 폭탄을 철 로와 해로를 통해 각각 들여와 은닉한 후 대부분의 단원이 국내로 잠입 하여 투탄의거를 추진하려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대대적으로 검거되어 드러났다. 38) 3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ꡔ독립운동사 제7권: 의열투쟁사ꡕ, 1976, 312~3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