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page

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35 행렬에 참여했으며 이튿날 선생으로부터 최익현의 충성담을 들었다고 한다. 32) 최천택도 육영재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1907년 장지연의 시일 야방성대곡을 어른들로부터 들으며 일제의 침탈에 의한 나라 잃은 슬픔 을 몸소 체험하며 저항의식을 키웠다고 한다. 33) 이런 와중에 사립학교규 칙에 따라 육영재가 사립육영학교로 전환되고 일제시기에 이르면 부산 진보통학교로 개명하자 오택 또한 부산진까지 통학하며 부산진의 친구 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유대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부산 공립상업학교 진학과 함께 그대로 이어져 정치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최천택의 회고에 의하면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자신은 광복단에 가입 하고 암암리에 동지들을 규합했는데 그들이 박재혁, 김인태, 김병규, 김 주영, 장지형, 오택 등이었다고 한다. 34) 회고이기에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이후 정황을 통해 볼 때 중국 및 영남과 충청을 중심으로 전개 된 광복회 조직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에 대해서는 보 다 심도 깊은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최천택을 중심으로 하는 ‘동국 역사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08년 사립학교규칙과 1911년 조선교육령 에 의해 조선의 글과 역사는 배울 수 없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최천 택을 중심으로 박재혁, 김병태, 박흥규는 1912년 동국역사를 등사하여 비 밀리에 학우들에게 배부하다가 부산경찰서에 검거된 사건이었다. 35) 이 처럼 이들은 단체에만 가입한 것이 아니라 실제 독립사상의 고취와 독립 운동 실천에도 적극 나섰다. 1914년 봄 부산공립상업학교 동창생들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조직을 결 성하는데 구세단이 그것이었다. 구세단에는 박재혁, 오택, 최천택 등은 물론 박흥규, 김병태, 김인태, 왕치덕, 김영주, 장지형, 조영상 등 16명이 참여했다. 구세단은 경남 각지의 유능한 청년들을 모아 독립운동에 직· 32) 김삼근, ꡔ부산출신독립투사집ꡕ, 82쪽. 33) 박원표, ꡔ釜山의 古今ꡕ, 142쪽. 34) 박원표, ꡔ釜山의 古今ꡕ, 143쪽. 35) 박원표, ꡔ釜山의 古今ꡕ, 143쪽 ; 권오현, 「외롭게 살다 간 抗日투사 蘇庭 崔天澤」, ꡔ어둠을 밝힌 사람들ꡕ, 부산일보사, 1983, 178~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