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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8집 단련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 마을의 조선인 학생, 청년들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순국한 선현들을 기리고 있는 상징적 공간인 정공단과 일본을 통하지 않고 신문화를 습득할 수 있는 부산진교회 등을 비롯한 신식 학 교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한일강제병합과 함께 독립 의식을 더욱 고취·확립해갔다. 특히 이들 부산지역 의열투쟁 관련 인사 들은 다른 조선인들과 달리 개항과 더불어 불어온 새로운 근대화에 적극 적응하는 한편 부산항으로부터 확장하는 일본인들의 진출을 몸으로 느 끼며 이에 저항하는 민족의식도 어릴 때부터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러한 민족의식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러한 교육의 장은 학연을 통 해 더욱 심화되었다. 다음으로 이들의 유대감을 의식적으로 더욱 공고하게 만든 것이 학연 이었다. 아래 <표 5>는 이들의 출신 학교를 통해 학연 관계를 나타낸 것 이다. <표 5> 사립 육영학교와 부산공립 상업학교 수학자 명단 학교명 성명 사립육영학교 (육영재) 박재혁, 최천택, 오택, 김병태 부산공립상업학교 박재혁(4회), 최천택(4회), 김영주, 오택(4회), 박창수, 왕치덕(3회) [출전] 부산상업고등학교동창회, ꡔ釜商百年史ꡕ, 1995 ; 김삼근 편저, ꡔ부산독립운동투 사집ꡕ, 1982. [비고] 육영재는 정공단에 설치되었다가 1908년 사립학교규칙에 따라 사립육영학교로 전환되어 범일동에 설립되었다. 일제시기 부산진보통학교로 전환했다가 현재 부산진초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공립상업학교는 개성학교의 후신으로 1908년 부산실업학교에서 1911년 부산공립상업학교로 교명이 바뀌었고 이후 부산진상업학교, 부산제2상업학교로 바뀌었다가 해방 이후 부산상업고등학교 로 개명되었다. 현재는 개성고등학교로 전환했다. <표 5>에서와 같이 이들은 어린 시절 거주지 근처 정공단의 육영재에 서 한학을 수학했다. 당시 주례에 거주하던 오택은 한학을 공부했는데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의 장례행렬이 주례를 지나갈 때 만장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