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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남지역의 의열투쟁과 지역성 133 의해 부산진 왜성으로 축조되어 이후 증대산성과 자성대가 부분적으로 남아, 그 주위로 부산진 시장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었다. 부산이 개항되 고 부산항을 중심으로 무역이 활성화되자 조선인들은 초량과 부산진에 대거 몰려와 살기 시작했고 초량으로부터 이곳에서도 조선인들을 위한 학교(일신여학교, 육영학교)와 교회(부산진교회)가 세우지는 등 신학문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한편 부산항을 중심으로 ‘일본인사회’를 형성한 일본인들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 본격화되는 일제의 침탈 활동에 부화뇌동하며 그 선두에 서서 활동했고, 부산에서도 일본인 사회를 확장하고자 갖가지 개발 사업을 전 개했다. 특히 자신들이 거주하는 부산항을 중심으로 하는 거류지를 명실 상부한 ‘대륙의 관문’으로 만들기 위해 시가지 확장을 추진했다. 이에 초 량과 부산진의 조선인 마을로 한편에서는 교통 기관을 통해, 다른 한편 에서는 매축을 통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개항 초기 일본인 거류지와 초 량을 가로막고 있던 영선산에 의해 일본인 사회와 조선인 사회의 분리된 이원적 구조가 경편철도(이후 전철)라는 교통 기관과 부산진 매축을 통 해 혼합된 ‘이중사회’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일본인 사회의 일방적 힘의 우위 속에서도 갈등, 배척, 저항, 융합, 동화 등이 일어났다 고 할 수 있다. 그 갈등의 한 표현이 부산진 지역에서 일어난 전차 전복 사건이었다. 일제의 조선 침탈이 부산에서 부산진으로 전철이 관통되면 서 실현되었고 그 과정에 조선인이 치여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부산진의 조선인들 천여 명이 전차를 전복시키는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31) 이 사건에도 최천택, 오택 등 부산진의 청년들이 중심에 있었다고 하니 이 들의 강고한 연대감은 일제의 침략과 그에 따른 현실적 위기감에 대한 반대급부로 더욱 공고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 부산진의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 제국주의 의 침략을 몸소 체험하며 이질적 문화에 저항하기 위한 신체와 정신을 31) ꡔ釜山日報ꡕ 1916년 9월 15일 「永嘉臺下月下の慘劇」.